일 대 일
메타포 그리고 병신들의 향연
민주가 살해당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란 메시지를 던지며 영화는 끝난다.
너는 누구인가...
저 14인의 병신들 중 입맛에 맞는 병신을 취사선택하라고
감독은 묻는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연놈들치고
그 진열장에 나열된 `병신14종` 중 구미에 당기는 병신하나쯤
없을 수 없다. 그건 다름 아닌 바로 내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에.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나태하며 적당히 탐욕스러우며
또 적당히 무식하고 적당히 인내하며 적당히 사랑하며 적당히 숨만 붙은
꼬라지 고작인 바로 `나`인 것이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 영화는 충분히 그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줬다고 본다.
`넌 도대체 어떤 병신이냐`라는.
그러나 영화는 개운하지 못한 여운을 남긴다.
그 찝찝함의 원인은 무얼까를 생각하다 거기에 대한 답을 찾고
화가 치솟게도 해준다. 그건 바로 마동석의 절규 때문이었다.
그 장면하나로 순간 이 영화의 모든 것은
그저 그런 `병신`이 되어버린다.
그 절규로 인해 영화는 끝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렸다.
`씨발, 복수를 응징을 집회를 봉기를 하란 소리야 말란 소리야`
그렇다. 그냥 병신스러운 몸짓인 것이다 또 다시 지긋지긋하게.
죽음 앞에 잔치판을 열어도 부족할 텐데 진정 그러할 텐데
왜 날 시험에 들게 하냐며 고난을 주시냐며 울먹였다는 놈의 최후가 떠올랐다.
그것은 현신으로 행한 것들에 대한 배반이며 자기모순이다.
이렇게 살아가라 해놓고 그게 옳은 것이라 해놓고 막상 `순간`이 오자
병신스럽게 울먹이는 그놈이 생각난 것은 우연은 아니리라.
그 볼썽사나움에 러닝타임 내내 따르던 순수의 중생들은 병신이 되고 만다.
가더라도 웃으며 가야하는 것이다.
승복이 아닌, 해탈한 듯한 관조 그 비켜섬이 아닌
모든 걸 씹어 삼킬 듯한 부라린 눈알의 희망이어야 비로소 옳은 것이었는데
씨발스럽게도 병신스러운 절규가 고작이라니.
부디 속편이 나와 해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변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잘못 생각했노라고` 몽둥이를 들었던 그 손으로
행복한 살인을 저질러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시대를 사는 14종병신들 몸뚱이에 배인 그 패배감을
씻어주었으면 그래서 생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희망에 차 거리로 뛰쳐나와
찍소리라도 한번 싸지르고 승불케 해주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민주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까지 그 피를 우리 등골에서 빼먹었지만
꼭 그러리란 법 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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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한숨하나 거기 눈물하나
더 보태본들 더 묻혀본들
기울겠어 적시겠어
바위를 스치는 옷깃 바위에 깨지는 달걀
시간만 아까운걸 먹기도 아까운걸
하얀 모래알을 걸으며 노릇 향기로움 먹으며
따가운 햇살에 풍만한 뱃살에
눈살 찌푸리며 한숨 꼬집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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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Vs
나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