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그야말로 벼락이 머리를 직통으로 뚫고 지나는듯한 짜릿한 감명을 받았다.

`동`을 지나 `서`로 건너며 다소 고생했을 사상의 여정

그 시작점에 바로 이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SF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구차스러운 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더더구나 이 영화는 `윤회`라는 하품 나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바로 `개벽`에 대한 이야기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그래서 `윤회`라는 어설픈 함정에 빠지기 쉽지만

영화는 무서울 정도로 처절하게 `혁명`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바로 사상과 이념 그리고 신념의 파괴를 외치고 있을 뿐이다.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그 한마디로

그녀는 웃으며 죽어간다.

`죽음`은 필멸의 존재에게 더 없을 `공포`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문턱을 보란 듯 야릇한 웃음에 섞어버리며 눈 감는다.

바로 십이제국 아직 떨고 있을 `인류`를 향하여 기쁘게 죽음, 그 경계선에

첫발을 내딛는다.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지혜를 쌓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거나

진리를 찾기 위해 지혜를 탐구하거나

어쨌건, 인간은 진리를 추구한다.

치열하게 탐구하다 어느 순간이 오면 거짓말처럼 인간은 멈추어 버린다.

그때가 바로 `공포`를 느꼈을 때다.

인간의 한계. 그 지적팽창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공포`인 것이다.

 

그건 인간이 문명을 가지며 그리고 발전시키며 서로에게 했던 약속의 이행이다.

그 `약속`을 깨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포기` 행위가 바로 공포인 것이다.

종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온 신과의 약속. 문명이 우리에게 알려준 공존의 약속

그리고 선조들이 우리에게 가르쳤던 겸손의 약속. 그것이 누 천 년간 우리들 피 속에

적위 되어온 결과가 바로 `의지를 가진 포기` 즉, 공포를 느끼면 모든 지적활동을

중단해버리는 인간의 약속이자. 약점인 것이다.

 

가끔 난, 정말 어쩌면 바로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건 주술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지구 또한 하나의 인과 속에 살아내고 있을 뿐인 유기체라고 믿기 때문인데.

바로 그놈도 인간처럼 필멸의 존재. 마찬가지로 그놈도 우리처럼 불멸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놈도 우리처럼 죽기가 싫은 것이다.

그렇다. 그놈도 바로 우리처럼 소멸 되는 게 싫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줄기세포 곳곳에 `생명유지장치`에 속하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숨겨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공포`라는 수문장이 지키고 있는 수수께끼 말이다.

 

그건 진리를 탐구해 나가다보면 필히 만날 수밖에 없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울타리와 같다.

바로 `문`인 것이다. 그 울타리 너머에 한 발짝 바로 거기

`진리`는 외로움 속에 이름 붙여질 날만을 쓸쓸하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인간은 `공포` 때문. 언제나 탐구의 동굴에서 들었던 횃불을 끄고 돌아서기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밝혀진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건 이제 누구나 나눠가질 수 있는 지혜이자 지식일 뿐이다.

`진리`는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는 바로 그 경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엔 호발의 틈도 없기에 어쭙잖은 `윤회` 따위가 `천국` 따위가 끼어들 틈이라곤 없다.

 

혁명의 이야기 바로 개벽의 이야기인 것이다.

인류문명에 오래전 던져진 화두와 같은 것이다.

 

너희 바로 깨치고 나아가 그곳에 내가 있는 이곳에 발을 내딛으라는

그래서 공간을 넓히고 차원을 넘나들 `상상의 날개`를 주었던 것인데

지금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는 `진리`의 물음인 것이다.

날개를 달고 횃불을 드높이고 부디 나를 찾으라는 외침이다.

 

고독이란 말을 만든 것은 인간이 아니다.

`고독`이란 말을 만든 것은 바로 그 `진리`다.

아직도 어딘가 홀로 쓸쓸히 이름 붙여질 그날을 기다리고만 있을.

 

개벽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혁명을 뜻한다.

새로움을 뜻한다. 완전한 의식의 전환이다.

바로 시각의 다름이다. `기경`에 색안경을 덧붙이고 보는 세상인 것이다.

그동안 만들어진 논리와 사상의 탑을 모조리 파괴하고 평평해진 그 땅위에

전혀 다름을 건설하는 의식인 것이다.

수운이 말한 바로 그 `개벽`된 세상인 것이다.

 

문이 열리면 또 다른 문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그저 하늘로 펼쳐져 옅어지다 섞여들지 바로 그곳까지 다다라보지 않고는

우린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순간이 눈 앞 닥칠 때 쫄지는 말자고 영화는 얘기한다.

 

돌아오는 자 하나 없다.

오기 싫을 만큼 그곳이 좋던가. 올 수 없을 만큼 산산이 흩어져 섞여버렸기 때문 아닐까?

찾을 수 없을 만큼, 다시 뭉쳐지지 않을 만큼.

어쨌건, 다시 돌아오는 자 하나 없다.

미래에서 온 손님도 아직 없다.

일찌기 누군가 한 발짝, 진리를 마주한 그곳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고

용감하게 마주섰더라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까?

(공포? 어쩌면 거긴 너무 평온해서일지도 모르겠군)

 

사상도. 이념도. 그리고 그 어떤 종교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내가 나로써 존재했더라면

어쩌면 지금 우린 벌써 우주를 날고 있을지도 그리고 미래에서 온 손님과 우주에서 온

친구들과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아 웃으며 재미난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뚜렷한 눈동자가 있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기꺼이 나는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난 반드시 돌아와 알릴 것이다.

앞서간 놈들이 바로 `개새끼`들이었다고 와서 분명히 고자질을 할 것이다.

후에 만일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거기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더 이상 너흰 머리 숙여 살지 말고

네 정과 신의 당당한 주인이 되어서 우주를 날고 미래를 맞이하며 살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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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동가서

유무불관

그런들 또 어떠리

 

나를 구하려

곱게 지은 옷

그 뒤에 너는 웃는데

 

너를 구하려

곱게 지은 옷

네 뒤에 내가 웃는데

 

너를 입고

내 옷을 버리니

결국 모두를 잃은 벌거숭이

 

췌마

냥유

그런들 또 어떠리

 

그래 너는 어디에 

그래 너는 어디에 

나는 나는 벌거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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