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그리고 중용

 

`중용`하면, 우린 흔히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아 흐트러짐 없는

부동의 상태를 떠올린다. 그러나 참된 의미로 `중용`은 그런 정적인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없다. `중용`이란 변화와 발산. 그 극단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일보직전의 모습인 것이다.

 

그 표출 된 모양이 분노든, 용서든 상관은 없다.

중용의 원천은 그런 깨달음의 숙성이다. 오래 묵히고 있는 그것이 

분노. 이해 무엇이든 참아낸. 품어온 시간의 단위

그게 바로 `중용`그 자체인 것이다.

바람에 날린 작은 불씨하나로 인해 그간 숙성시켜왔던 `중용`은

비로소 타올라 빛깔을 그리고 강도를 각기 달리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중용`이란 꿈틀거리는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아침이슬에 거죽만 젖은 지푸라기가 품은 불똥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용이란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자들은 `지금시대`에는 그저 회색분자이며.

이기와 기회주의자인 동시에 그런 자는 밥버러지일 뿐이다.

 

우린 어서 이 잘못된 착각에서 벗어나야한다.

죽은 후에나 있을까 말까한 틀린 `중용`의 잣대를 왜, 멀쩡히

산 지금에서 구현하려고 애쓰는 가 말이다.

그건 벌써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데. 변화가 없다면

그게 무슨 산 하늘인가 말이다.

 

중용이란 위아래. 좌우 어디든 변화할 수 있는 본연의 기질인 것이다.

단지 방향을 정하지 않은 가운데 가능성. 그게 곧 중용의 전부인 것을

우린 이제라도 알아야한다.

 

지금시대. 아직 갈 방향을 정하지 못해, 화도 웃음도 낼 수 없는 자

그 누구인가!

지금 시대. 어리석게 이도 저도 아닌, 그저 그게 바르길 믿으며 살아내는 자

그 누구인가!!

 

소리쳐라 그리고 행동하라.

그게 틀린 것 일지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건 바로 내게서 그치는, 끝나는 외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밟고 찢고 지날 후대가 있는 한 틀림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진정 부끄러움은 알고도 침묵하는 보고도 외면하는 `중용` 그것에 있다.

한 톨의 공기. 그저 먹는다고 살아내고만 있다면 그게 바로 부끄러운 것이다.

 

죽음. 그 관뚜껑을 다시 열어 벌할 수 없는 지금.

너무 쉽게 죽어나자빠지는 개새끼들이 넘쳐나는 지금.

민주주의의 말로에 `지금시대`는 겨우 당도했다.

그대, 저 격동의 넘실거림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소리쳐라 그리고 행동하라. 그게 싫거든 죽어지낸 듯

이후 변해가는 시대에 개소리 말고 어느 귀퉁이 찌그러져

살아온 그대로 죽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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