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무삭제 5분 하이라이트

그리고 ...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0분 

1949년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는 백범의 거처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간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4발의 총탄을 백범을 향해 발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타난 현병차량을 타고 잡혀갔으나

범행 2개월 후 종신형을 받고 3개월 만에 15년형으로 감형과 아울러 2계급 특진을 했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군납업을 통해 많은 부를 쌓았고

4.19 이후 진상규명위원회가 설립 되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후 잠적

1961년 서울에 김용희님에 의해 붙잡혔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단 이유로 풀려났고

1965년 강원 양구군에서 곽태영님의 손에 붙잡혀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했으나 완강히 거부

그런 안두희의 목을 찔렀으나 구사일생 살아남

 

 

그렇게 숨어살다가 결국 1996년, 안두희 집으로 찾아간 `박기서`선생의 정의봉에 맞아 죽음

박기서님은 `역사의 심판엔 시효가 없다면`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처단 하고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함

법원은 박기서님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으나, 애국단체 및 많은 시민들의 힘으로

1998년 3.1절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심

 

 

출감 후 생활이 어려워 택시운전을 하고 계시는 중

우리나라의 의로운 자들은 항상 생활고에 시달리는 안타까운 현실

 

효창원 백범 묘소 앞 `박기서`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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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612568&srchid=IIM7EOY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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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씨 암살배후 폭로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씨(76)가 범행 43년 만에

김구 선생의 암살배후에는 당시 특무대장이었던 김창룡씨가

관련돼 있다고 1992년 4월 12일 폭로했다.

안씨는 또 범행에 앞서 김씨 외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당시 미CIA 한국 담당자였던 미군 중령과 수차례 만나

김구 선생은 없어져야 한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실은 권중희씨 등 3명이 4월 12일 오전 11시쯤 인천시 신흥동

안씨의 집을 방문, 8시간동안 면담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안씨는 "입당이후 서너차례 경교장에 드나들며 백범 암살기회를

노리던 중 1949년 6월 26일 우연히 경교장에 들렀을때 김구 선생이

독서를 하고 있어 범행적기라고 생각해 암살을 결행했으며 당시 자신은 포병장교로서

일선 중대장으로 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권총과 실탄은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또 안씨는 범행직후 헌병대로 연행됐으나 그날밤 곧바로 특무대로 이송되어

김창룡으로부터 "안의사 수고했소" "불편한 것 있으시면 말하시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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