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불가여동군`이랬다.

허나, 애초 그랬듯 우린 공자와 달리 ``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류도 꿈을 꿀까?

그렇다면 인류의 꿈은 무얼까?

문명의 나뭇가지는 지금 순간에도 우리가 꿈꾸는 곳을 향해 가지를 뻗어

가름막을 만들고 그 아래로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걸까?

초록을 먹고 회색만을 토해내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너그럽게...

그렇다면 공룡은 왜 몇 겹의 땅 밑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을까?

 

문명이 주는 달콤한 혜택과 맞바꾼 초록은 기형적 생태계를 만들어

그 생명력을 존속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중에 거추장스러울 인간은 결국 사라진

메머드처럼 몇 겹의 땅 속에서 깨어나지 못할 꿈을 꾸게 되겠지.

 

저들에게 `이것은` 색다름인가보다.

자연과 벗하여 살아온 우리들이 보기엔 너무도 당연한 정서를 이제 막

저들은 배우고 있다. 그와 반대로 지금 우린 저들이 걸었던

실패한 길을 죽으라고 뒤따르고 있다. 쉼 없이 현란한 네온사인에 취해.

그들도 우리도 그리고 누구도 꿈을 꾸지 않는 밤을 대낮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접점에 인류는 이제 겨우 당도했다.

그동안 아팠을 지구에 미안해서라도 우린 가만 생각을 해보아야한다.

 

건이란 아비와 곤이란 어미 그 포태 속에 인류는 동포다.

소우주는 고리로 존재하고 연결된다.

하나의 조각이 병이 들면 결국, 그와 연결된 모두에게 탈이 난다.

 

단지 내가 연결된 고리로 그 탈이 전달돼 오는 것에 시간이 걸릴 뿐이라

마치 그건 나완 무관하다 생각들뿐이다.

몇 개의 고리를 지나며 그 효과가 흡수돼 사라진 듯도 보이지만

결국 언제고 내게 그 파도는 밀려온다.

어떤 얼굴. 어떤 모양으로라도 분명코 온다. 그건 마치 죽음과 같기에

도저히 우리로썬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정복이 위대한 시절이 더는 아니다.

나눔이 곧 위대함이며, 살아냄의 전부다.

 

인간, 결국 땅을 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고작 지구가 병들지 않게 그래서 우리도 병나지 않게 보살피는 게 전부다.

이런 깨달음조차 없는 우리에게 우주는

쉽사리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우린 그 해답을 벌써 오래전 알고 있었다.

 

상선약수란 바로 인간이 살아갈 방향이다.

모든 걸 생하게 하면서도 돌아서갈 줄 알기에 다투지 아니하며

항상 낮은 데로 흘러 부족함을 채우고 넘치면 또 낮게 흘러

부족한 곳을 보살피는 그 외엔 딱히 방법이란 없다.

우리에겐 정말 없다.


(나의 집)

나의 정원에 해는 기울고

새들은 날아와 노래한다

꽃들은 빛을 다투어 기지개를 펴고

나무는 지혜롭게 열매를 나누고

다람쥐는 적당한 곳을 찾아 그 씨앗을 심는다

 

나의 거울에 달은 떠오르고

풀벌레는 자장가 노래한다

꽃들은 창을 닫고 꿈속에 잠들고

나무는 깊은 숨을 들이켜 내일을 열고

부엉이는 날아올라 골고루 그 달빛을 옮긴다

 

나의 집은 그 풍경 속 귀퉁이 한쪽에

흙과 나무와 분간이 어렵지만

하얀 뭉게구름 한줄 피어올라 들녘의 가을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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