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한 인간에게 저지르는 만행
동일한 내용의 거짓을 반복적으로 노출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진실유무와 무관하게
끝내 그 정보를 참으로 여기게 된다.
철저히 이해관계 그 속에서 `나`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들에
사람들은 잔인할 만큼 무감각하다.
`나는 아니니까` 또는 `설마 내 방문을 두드리는 불운은 없을 거야.`
하는 심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설혹, 그 억울함 안다고 해도 얼마못가 양은냄비에 넣고 뚜껑을 닫아버리지 않는가.
힘없는, 대부분인 우리들은 그 억울함 덧씌운 권력에 맞서기 위해선
`육조지` 험난한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저 그런 재수 없는 일이 나를 비껴가기만을 소원하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눈밖에 안 나길 바라며 그어놓은 선을 밟지 않기 위해
땅바닥만 열심히 노려보며 살아간다.
똑똑한 놈이 `정` 맞는 시절은 갔다.
지금은 단지 똑똑한 놈이 멍청한 척 사는 세상일뿐이다.
맞서기보단 모른 척, 못 본 척, 아닌 척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숱한 정의의 패배를 목도하며 뼈저리게 체득해버린 것이다.
그런 배움의 시간이 너무나 길어 이젠, 길바닥에 정의가 떨어져도
어느 젊은 하나 줍지 않게 된 세상인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패배했을 때 개인이 느끼는 모멸감은
그걸 지켜보며 침묵할 수밖에 없던 주변 사람들의 수치심은
또 그렇게 침묵으로 맞바꾼 하루를 버텨내는 댓가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며, 그 죄스러움 자위하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파괴하며 동반돼 오는 고통을 빌어
그날의 수치를 지우며 살아가는 것이 고작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게 인생이라고`
`이게 살아감이라고`
`그래도 저 모퉁이 돌아 파랑새는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래서 지금 시대에 갈릴레오는 넘쳐나지만
정작 필요로 하는 브루노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는 언론.
곡필은 할지언정 각필은 할 수 없다는 이시대의 저널리스트
그런 모두의 방문 앞에 어서가자는 `노크소리`가 하루바삐 들리기를 바라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다들 하루빨리 되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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