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동

 

물끄러미 올라다 본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이다. 당장에 비라도 하나 아쉬울 것 없는 빛깔이다.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내는 그 회색공간에 빨갛게 물이든 검을 아직 가라앉지 않고 떠도는 흙먼지 위로 세차게 한번 휘두른다. 빨강은 흙먼지를 가르고 짤막한 검은 줄 하나 남기며 땅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방금까지 회색이었던 공간에 하얗다 못해 푸른 두 자 가량의 틈새가 만들어지며 피를 뱉어낸 사내의 검은 그 회색의 공간에 짧아져간다. 검집에 칼을 먹인 사내는 널브러진 시체를 향해 돌아서며, 한숨을 섞는다.

그랬듯, 그와 같기를

`헌데, 좀 이상하군. 저 놈들이 언제부터 이 시각에 그리고 저 수로?`

이 산길을 택한 후, 거듭되는 습격에 사내는 지쳐있었다. 초입부터 야캣들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야캣들은 하늘에 해가 걸려있는 한 여간해선 활동을 하는 마구니가 아니다. 어린 아이정도의 작은 덩치와 무딘 송곳니로 인해 주로 작은 초식동물만, 그것도 열 마리 정도가 무리를 이루고 난 후에야 사냥을 하는 게 고작인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 제대로 된 무리를 이루지도 않고, 아무리 먹구름에 가린 하늘이라도 이런 대낮에 건장한 성인에게 덤벼든 것이다.

`평소, 저 놈들이 진을 형성하고 사냥을 했던가? 잠자는 산이라, 재밌는 산이로군.`

사내는 생각보다 빨랐고 강했다. 야캣들의 날렵함을 압도하고 있었다. 벌써 네 번이나 실패를 했다. `이제 야캣도 몇 마리 남지 않았어. 어떻게 하지`

치우라치! 그만 야캣을 후퇴시키자. 이대로 가다간, 이대로 가다간...”

바위 뒤에 잔뜩 몸을 숨기고, 아래쪽 싸움을 지켜보던 두 개의 그림자들 중에 유난히 떨고 있는 한 그림자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다급하다.

늦었어, 저 놈은 너무 강해. 누나,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가만히, 저 놈이 멀어지길 기다리자.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분노에 막 뛰쳐나가려는 그림자를 붙잡는 손 하나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다 끝장나버렸어, 이제 마을은 그리고 우리부족은`

사내가 멀어지자 치우라치라 불린 소년은 말릴 틈도 없이 바위에서 쏜살같이 아래로 달려 나갔다. 그 뒤를 작은 손 하나가 허공을 붙잡으며 따르다 미끄러지며 구른다.

아얏. 치우라치! 돌아와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누나, 야캣들이 다, 전부 다 죽어버렸어. 이제 어떻게 하지? 저 놈을 막지 못하면, 우리 마을은, 우리부족은 다 끝장날 거라고!”

야캣의 가슴에 엎드려있던 아이는 다가오는 누나를 향해 울먹인다.

돌아가자. 저 자가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우리가 앞질러 가야해. 야캣들은 어쩔 수 없어. 어서 일어나

여자아이의 손과 무릎에선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까 동생을 붙잡으려다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면서 아래까지 구르다시피 내려온 것이다. 여자아인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사내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며 동생의 어깨만 떠밀고 있다.

일어나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마을이 위험하다고, 저 자보다 더 빨리 마을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해. 자꾸 바보처럼 울고만 있을 거야? 아빠가 한 말을 벌써 잊은 거야? 설촉에 올랐으면 너도 이제 어른이 된 거라고 그러셨잖아!”

과연 소녀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이들은 설촉부족 또는, 놋대산 부족이라고 불리는 잠자는 산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산족들이었다. 그들이 터전을 이루고 사는 잠자는 산은, 일만 년 전 개벽기 때, 인간과 마구니들이 하늘과 땅을 두고 다투었는데, 후에 패왕 양수라 불리는 석공이 나타나 대마구니와 세상을 건 단판승부내기에서 이긴 후, 세상은 지금의 조화를 찾게 되었고, 이후 노년의 석공 양수는 잠자는 산 어딘가에 자신이 직접 무덤을 만들었고, 바로 거기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지금은 단지, 음유시인들이 부르고 부르다 더는 부를 게 없을 때 부르는, 이제는 누구도 따라 부르는 이 없는 노래로 남겨졌을 뿐인, 곳이지만 말이다.

`그래, 맞아. 분명 놈들은 진을 이루고 있었어. 한 놈이 공격을 하면, 공격이 닿기 전에 다른 한 놈은 사각을 노리고 달려들었고, 다른 놈들은 앞뒤로 나뉘어 섰지. 그렇게 몇 차례 공격을 해오다가 서로 선 자리와 공격 위치를 바꾸기도 했고 말이야.`

 사내는 이리저리 손을 휘두르며 좀 전에 있었던 전투를 떠올리면서 걷고 있었다.

산 속의 해는 빨리 저물어 주위에 어둠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적당히 바람을 피할만한 장소를 찾으려 들러붙는 나뭇가지를 헤치며 걷던 사내의 눈앞에 작은 나무집이 어렴풋 보였다.

`찰코들이 쓰던 초가인가? 사냥철이 지났으니 비었을 테지. 다행히 오늘은 저기서 밤을 보낼 수 있겠어.`

사내는 나무집이 가까워오자 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못처럼 생긴 무언가를 몇 발자국마다 하나씩 땅바닥이나 나무에 던졌다. 그 물건은 손가락 한마디 정도만 남긴 채 땅바닥이나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바람의 뜻으로 여길 또 지나네. 문을 열겠소.”

어느새 나무집 앞에 선 사내는 문 앞에 서서 찰코들이 쓰는 은어로 인사를 건넨 것이다. 그 뜻은 바람에 떠밀려 세상을 떠돌다, 같은 곳을 또 지나게 되었으니 좀 쉬었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실례하고 문을 열겠소.”

나무집안은 잘 정돈 되어있었지만, 식탁이나 침대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전에 머물렀던 찰코들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보통 찰코들은 사냥철이 끝나면 그동안 본인들이 묵었던 나무집을 아무렇게 내팽개치고, 그동안 잡은 사냥감을 짊어지고 떠나기에 바빴기 때문인데, 지금 나무집안은 정돈이 잘 되어있었고, 단지 그동안 손보는 이가 없어서 쌓인 먼지가 전부였던 것이다.

침대만 털어내면 되겠군.”

벽난로 한쪽에 남아있던 장작을 몇 개 집어던져 불을 피운 사내는 식탁에 앉아, 작은 가죽주머니를 입에 가져다 대고 몇 모금 마신다.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그동안 수천 년, 수만 명이 나처럼 이 산을 올랐지만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을, 내가 과연.., 찾아낸들 또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 거지? 왕국은 멸망했고 루이루는 떠났는데, 샤카림을 처단 한다 해도, 무엇하나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뿐인데.`

그때, 식탁위에 올려져있던 사내의 검이 진동을 일으키며 식탁을 두드렸다. 아직도 울고 있는 검을 쥐고 사내는 슬며시 일어났다. 나무집에 들어서기 전 심어두었던 백보갈퀴가 보내오는 신호에 사내의 검이 반응을 하며 떨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 ... 많군, 또 야캣무린가? 잘 됐군. 일부러 냄새를 지우지 않길 잘했어.`

사내는 차륜전을 펼치듯 달려드는 야캣들에 지겨워하던 참이었고, 일부러 자신의 흔적을 남겨 야행성인 놈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벽에 기대 창밖을 내다보던 사내는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오늘밤은 유난히 길겠어.`

창밖은 야캣의 안광으로 보기 어려운 수십 개의 도깨비불이 여기저기에서 출렁이며 사내가 있는 나무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산에는 흥미로운 마구니들이 많은가 보군

사내의 말이 끝나자 나무와 바닥 곳곳에서 폭음과 함께 하얀 섬광이 일어나며, 나무집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백보갈퀴 중에 야탄을 쓴 것이다. 백보갈퀴 머리 부분에는 불꽃을 일으키는 화약이 심겨져있는데, 그것이 터지면서 지금처럼 주변을 밝혀주었던 것이다.

`인간? 사람이잖아. 한밤중에 그것도 이런 산골짜기에..,`

바람의 뜻으로 여길 또 지나게 되었소.”

창밖으로 보였던 도깨비불은 저 마다 손에 들고 있던 나무진액을 먹인 횃불이었던 것이다. 사내의 찰코들이 하는 인사를 건넸음에도 듣지 못한 듯, 무리는 멈추지 않고 조금씩 사내를 좁혀오고 있었다.

모두 멈추시오. 더 다가온다면, 필히 누군가는 칸토의 손길에 잠들게 될 테니.”

이 지역 사람들에겐 많은 신이 있었고, 사내가 말한 칸토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칸토의 대롱으로 빨려 들어가 칸토의 대전에 모여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게 되는데, 그럼 칸토는 불의 철좌에서 내려와 불붙은 그 손으로 죽은 자들의 머릴 쓰다듬는데 이때, 살아생전 행복했던 기억이 많았던 자는 칸토의 우측으로 가서 살게 되고, 불행했던 기억이 많았던 자는 칸토의 좌측으로 가서 살게 된다고 하는, 얼마 전 묵었던 낭객장에서 들은 음유시인의 노랫말이었다. 사내는 이 순간에도 좌측이 어떠했는지, 우측이 어떠했는지 떠올리게 되었고, 술주정에 가까웠던 늙은 음유시인의 모습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얘길 다급함에 내뱉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도.

이름을 밝히시오. 그대가 말한 칸토의 지혜로움에 생을 걸고, 당당한 그대의 이름을 밝히시오.”

걸음을 멈춘 무리들 중에 누군가 사내를 향해 물어왔다. 무리는 하나같이 검은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이었다. 누군가는 손에 보리를 털어낼 때 쓰는 요상하게 생긴 물건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의 손에는 제법 날카로워 보이는 삼지창을, 누군가는 이가 다 빠진 낡은 삽자루를 들고 있었다. 이를 본 사내는 저들이 불을 내 터전을 만들고 사는 화전민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칸토의 덕분이리라 생각한 사내는 약간의 긴장을 늦추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나는 나무로스에서 온 나그네요. 바람에 떠밀려 오늘 이곳을 지나게 되었을 뿐이라오. 밤이 깊어 찰코들의 나무집에 이 밤을 지내려고 하니, 부디 친구들은 칸토의 벗인 나에게도 온정을 허락하길 바라는 바요.”

말을 끝낸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번개처럼 검을 뽑아들었단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요망한 마구니들이 대낮을 걷고, 이젠 신의 이름까지 팔고 있구나!”

크게 소리친 사내는 두 눈에 신광을 번뜩이며, 무리들 중에 작은 그림자를 향해 달려갔다.

! 엄마야.”

어린 소녀의 비명과 함께 그 소녀는 사내의 검을 등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검을 거두었으나, 마지막 도약이 너무 강했던 터라 미처 몸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어린 소녀를 가슴에 안고 몇 발을 더 날아갔다. 사내는 본래 소녀 옆에 있던 야캣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는 섬추라 이름 지은 사내의 발검식 중에 하나인데 빠르기가 제국 최고였다. 섬추는 발검과 동시에 적진을 향해 뛰어들어 도약했던 몸이 검과 같이 노렸던 목표를 휩쓸고 지나며 착지와 동시에 방향을 틀어 다음 목표까지 순식간에 날아가 찔러버리는데, 처음 도약이 바로 이 검법의 핵심이었다. 도약에서 생긴 속도를 그대로 유지해 몇 번이고 착지와 동시에 방향을 틀어서 찔러대며 적진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검법중 하나였던 것이다.

`뭐지. 마구니라고 느낄 수 없는 온기가 있군. 울고 있는 건가?`

사내는 품속에 아직도 울고 있는 소녀를 보며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소녀의 품속에서 으르렁 거리는 야캣의 울음소리에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내려놔, 내려달라고!! , 우문수리를 괴롭히는 거야. 으아앙.”

소녀는 사내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 `

우두커니 서있던 사내는 등에 통증을 느끼며 돌아본다. 어린사내아이 하나가 나무로 만든 검을 칼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우리누나를 놔줘! 내려놓으란 말이야. 꺼지란 말이야. 황혼단 녀석들 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 코론. 바론 지금이야!!”

사내는 저도 모르게 소녀를 내려놓고는 사내아이가 휘두르고 있던 검을 빼앗아 들었다. 그때 검을 빼앗긴 사내아이가 뭐라고 소릴 치자, 나무 위에서 검은 물체가 쏜살같이 사내를 향해 덮쳐왔다.

멈춰, 멈춰요. 아저씨 제발! 고론, 바론 물러서. 물러서라고. 치치, 누나말 들어 누난 괜찮아. 어서 애들을 불러드려

사내는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매복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중에 바람소리가 일자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찰나, 소녀가 그의 팔에 매달려 버린 것이다. 그러는 어느새 무리들은 사내와 어린아이 셋을 동그랗게 둘러싼 채, 저마다 들고 있던 무기를 가슴 앞으로 바짝 들이밀고 있었다. 무리 중 한명이 후드를 벗고 한발 다가서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대형은 일사분란하게 한발 뒤로 물러서며 무기를 옆으로 내렸다.

치치. 치앙. 너흰 언제나 말썽이구나. 족장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흰 꼭 네 부모들처럼 무모한...”

그만하게, 치치. 치앙. 야캣을 데리고 이리로 오너라.”

사내의 말을 끊으며 백발의 노인이 무리 중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한손에는 육각형의 이상하게 생긴 원판을 들고 있었는데 횃불에 반짝이는 걸 보면 그 중간에 거울이나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았다.

이보시오. 우린 그대에게 이름을 물었소. 분명 그대는 칸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었고, 그래서 우린 멈추었던 것이오. 황혼단인 그대 스스로가 칸토의 지혜를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런 예를 다하지 않았을 것이오.”

노인은 목소리엔 강경함이 묻어났다. 사내는 일단 어찌된 영문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저들의 경계심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검을 검집에 먹이고 망토자락에 숨기며 노인을 향해 돌아섰다.

친구여, 난 황혼단인지, 뭔지 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오. 난 그저 잠자는 산에 볼일이 있어서 온 사람일 뿐이라오. 사정이 있어 내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이 말엔 조금의 거짓도 없소. 비록 난, 칸토의 지혜를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없었지만, 이 말에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일이라도 칸토의 대전에 무릎 꿇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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