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E의 항변

"벌써 사흘이 지났나보군, 어서들어오게. 약속한 최상의 녹차를 구했다네."
백발의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흙을 터는 카페트 위에 발을 몇 번 문지르며 민머리 노인의 너스레를 피해 모자를 걸고는 들어선다.
"하하하. 바로 그 최상의 녹차 때문에 지난 사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네. 어서 맛보고 싶어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왔지 뭔가."
`영감, 사흘간 잠도 거의 제대로 못잔 거 같은 몰골을 하고는, 눈 밑이 더 까매졌는데 무슨 어림도 없는 소리를, 무얼 가져온들 가져다댄들 이미 내가 세운 공식은 빈틈이 없단 말이야. 사흘간 나도 꼼짝않고 자네가 가져올 헛소리에 대비해 장기판의 말이 되어 온갖 수를 다 연구했다는 말이야. 패배한 자네를 생각하면 그깟 누런 물에 들어간 돈은 아깝지도 않다고`
"그래, 우리가 저번에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었지,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자네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놀라서 깜빡 차를 내오는 것도 잊었지 뭔가. 하하하"
민머리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린 사내녀석 하나가 은쟁반에 보기 좋게 반짝이는 주전자와 찻잔을 놓고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새로온 시동인가? 녀석 영특하게 생겼구만. 그럼 어디 맛을 한번 볼까."
"어떤가 자네를 위해 특별히 발품을 팔았는데, 자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평소 차를 좋아하지 않던 민머리 노인이 이 차를 구하기 위해 한 것이라곤 약간의 돈을 지불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가까운 식료품점에 들러 주인의 말을 듣고 아무거나 집어온 것이 고작이었다. 장사치들이란 뭐든 최고의 품질이라고 둘러대니 약속을 안 지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음, 향기 짙고. 깊군 오랜만에 이런 훌륭한 차를 마셔보는 것 같아."
`저 영감탱이가 이걸 최상의 차라고 대접을 하는군. 떫어서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 구만`
"잘 됐네. 내가 어디 자네만큼 차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이곳 저곳 믿음직한 장사꾼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판 것밖에는 없다네."
"그런가? 아주 좋네. 가는 길에 어디서 구입을 했는지 내게도 좀 알려주게나. 나도 이젠 거기서만 차를 사야겠어. 참 맛과 향기 진하군"
두 노인은 아이처럼 심술을 부리고 골탕을 먹이길 좋아한다. 누군가 이런 이 둘의 모습을 본다면 백발과 대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며 흉을 보겠지만 둘은 서로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한번 당한 골탕은 꼭 되돌려주는 걸 유흥으로 삼은지 꽤 오래되었다. 저번에는 민머리 노인의 모자를 바로 씌워주겠다며 백발노인이 자신의 손수건을 머리 위에 얹고 그 위에 모자를 덮은 적이 있었는데 민머리 노인은 그것도 모르고 시내에서 집까지 온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와 모자를 벗으며 떨어지는 백발노인의 손수건을 보며, 머리칼이 없어 누구보다 머리 위에 뭐가 얹혀있는지 잘 알아야할 자신의 머리통에 배신감이 들어 본인 머리통을 `찰싹` 내리치며 앙갚음을 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참에, 식료품점 구석에 먼지와 함께 삭아가는 녹차를 굳이 그 먼지를 뒤집어 쓰며 찾아내 집어든 것이다.
"그래, 사흘간 꽁꽁 싸맨 보따리를 슬슬 풀어보게나. 사람 애간장만 태우게 하지 말고 말이야"
"음, 그러세 자네가 저번에 한 얘기에 사실 난 조금 복잡했다네. 자네는 애초 이 이야기가 성립한 근거를 깡그리 뭉개버렸네, 해서 더는 이런 논박이 이어질 필요가 없었지만..."
"아니 무슨 소린가? 자네는 그것에 대해 이미 인정을 했지않나? 그리고 그렇게 따지자면 아마 
끝도 없을 걸. 자네는 저번 시간과 거리에 비례한 차원에 대한 가능성을 옳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내 주장을 잽싸게 훔쳐서는 자네 논리를 철회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예전 두 노인의 화두는 시간이 거리를 이동하면서 생겨나는 또 다른 차원에 대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그걸 빛이란 속도로 환원하면서 `다차원`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민머리 노인의 몇 마디에 영감을 얻어 민머리 노인의 주장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두 노인은 서로의 주장을 때론 뺏고, 훔치면서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심정으로 10여년을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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